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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위인 - 조 헌

역사이야기

by 고망띠네 2016. 7. 1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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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위인 - 조 헌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가 되었다. 

1572년(선조 5) 정자()로 왕이 절에 향()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에 기용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으로 남형()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종묘서령()을 거쳤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선봉에 서다
조헌은 당시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거듭된 상소를 통해 일본과의 절교를 주장한데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비왜지책(備倭之策)’이라는 글을 올려 조정의 의견과는 다르게 일본군이 종전과는 다르게 대규모로 침략해 올 것이며, 그 침입로는 호남이 아니라 영남 지방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변방에 명장을 파견해 초전에 일본군의 기세를 제압해야 하며, 일본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향도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문인 김절(金節)과 김약, 박충검(朴忠儉) 등과 함께 의병을 소집한 조헌은 충북 보은 차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퇴각시켰다.

6월에는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켜 1500명 이상의 의병집단을 구성했다. 조헌이 이끈 의병부대의 핵심 인물들은 양반들이었으나 그 구성원은 가정과 가동으로 지칭되는 천민들이 많았는데, 이는 군적에 올라있는 양인 장정이 관군에 징집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헌의 의병부대는 군수품 조달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홍성 이광윤의 합세로 이를 해결했고 의승장 영규(靈圭)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청주성과 금산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물론 처음에는 전라 의병장 고경명과 합동으로 금산을 공격하기로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호서침략의 본거지이자 호남으로 통하는 청주의 왜군을 공격한 것이 8월 1일의 청주성 전투였다. 청주성 전투는 조헌의 지휘 아래 승병부대와 합동으로 전개해 호서지방을 방어한 큰 의미가 있는 전투였지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조헌은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다. 도중에 영규의 승군과 합세해 8월 18일 전라지역으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1만 5000여 명의 일본군과 금산 연곤평에서 전투를 벌였다.


사실 조헌은 금산전투에서 충청도 관군과 연계를 시도했고 연계가 실패하자 전라도 관군인 권율과 연합전선을 시도해 구체화시켰으나 끝내 관군과의 연합전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조헌과 영규의 의병부대가 단독으로 전투를 개시했고 일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면서 호남지방을 보전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나 조헌과 당시 의병들은 이 전투에서 모두 장렬히 순절하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전투 후 조헌의 제자들이 칠백의사총’을 조성했고, 조헌은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됐다. 1647년에는 충청·전라도 지방의 유림들이 금산 연곤평에 종용사를 건립해 조헌을 비롯한 의병의 위패를 모셨다. 칠백의사총은 1963년 사적 제105호로 지정됐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헌선생의 정신

1. 조국수호정신

의병장 조헌은 선견지명이 있는 선비로서 일찍이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국방력의 강화로 조국을 수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애국적인 상고가 받아들여지자 않자 자기의 머리를 대궐 주춧돌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어 한탄하기를 「너희들은 왜적이 침입, 산골로 도망칠 때에 비로소 나의 뜻을 알 것이다.」라고 한 바 있었다. 조헌선생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왜적이 침입할 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충북 옥천에서 계시던 중 도끼를 가지고 임금님께 상소를 하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충신수길)는 전국을 통일한 여세로 명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비키라는 교섭을 해올 때이다. 이때 나라에서는 국론이 분열되어 갈피를 잡이 못하고 있었으나 위급한 나라일을 예견하신 조헌선생은 자기의 도끼로 왜국사신의 목을 베고 국토방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광론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헌선생은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않자, 이를 한탄하여 궁궐 주춧돌에 이마를 부딪쳐 유혈이 낭자했으나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조헌선생의 모습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조헌 선생의 충절은 당파를 초월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맨주먹으로 향리에게 분연히 일어나 의병대장이 되어 청주성을 수복하고, 금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이때, 전세가 위급해지자 그 부장이 후퇴할 것을 권하였을 때 조헌선생 「대장부가 국난을 당하여 마당히 죽음이 있을 뿐인데 어찌 구차스럽게 삶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외치면서 적을 무지르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충전하는 의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영규대사는 평소에 선장으로 무예를 닦더니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선생과 더불어 조국을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하신 분이다. 전황이 위기에 다다르자 「남아가 죽을대가 오면 깨끗이 죽을 것인지 어찌 혼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생사의 명은 재천이라 다만 의를 쫓아 죽을 따름이다.」라고 외치면서 장창을 휘두르다가 옥쇄하였다.


금산전투에 참가한 막료와 사졸 중에는 이름없는 향리의 애국자가 많았으며 그들 또한 영예를 구걸함이 없이 오직 국난극복을 위하여 귀중한 생명을 조국과 민족앞에 바쳤다. 더욱 칠백의사는 관군이 아니고, 모두 민병으로서 내 고장 내 나라는 내가 지키겠다는 한 마음 한 뜻으로 과감히 싸워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니 그것은 오늘날 향토예비군 및 민방위정신과도 일치한다. 칠백의사의 견적필살의 감투정신과 임전무퇴, 살신보국의 정신은 유례없는 구국의 사표이다.


2. 신의 단결정신

사람은 개성의 차이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같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칠백의사는 사사로운 감정과 당파를 초월, 협동단결하였으며 대의앞에 생사를 같이 하였다.

 
조헌선생은 금산성 공격시 우군과의 뜻이 맞이 않아 번민하였다. 혈전을 연기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조헌선생은 「내 스스로 약속한 전투 기일을 내가 어찌 이길 수 있느냐」고 하면서 전세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충성심과 신의를 지키는 고고한 기품을 발휘하였고, 칠백의사들은 이에 감동되어 굳건한 단결을 유지하였다.


여육대사의 의리감 또한 대단하였다. 그는 조헌선생에게 「우리가 막강한 왜적과 맞선다는 것은 경거가 되지 않겠느냐」고 결전의 연기를 제의한 바 있었으나, 이 싸움도중 그의 부하가 「일단 물러섰다가 다시 반격함이 어떠하오」라고 건의하였을 때 「주장의 결의가 반석같이 굳거늘 어찌 혼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하면서 신의와 동지애를 부르짖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칠백의사의 신의·단결정신을 찾아 볼 수 있고 이 거룩한 정신은 우리 역사의 불멸의 씨앗이 되어 외침을 받았을 때 국민들은 불꽃처럼 일어나 이에 맞섰던 것이다.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총화·단결의 정신이 바로 굳건한 나라발전의 원동력이라 하겠다.


3. 학행일치정신

사람이 배운 바를 실천한다는 것은 인격형성의 기본 조건이다. 조헌선생은 일찍이 이이선생의 문하에 충·효의 도를 수학하더니,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하였다. 또한 상소를 여러번 올려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을 것을 진언하여 곧은 신하로서 평이 나더니, 국난을 당하자 바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살신보국의 충성심은 신념이며, 그의 행동의 전부이기도 하였다.


때로는 직언이 너무 과격하여,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박해를 당한 일도 있었으나, 이에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언제나 대의를 내세웠으며, 탐관오리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매한 충절심에는 누구나 탄복했으니, 대의앞에 숙연할 따름이다. 의병중에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생명을 나라앞에 홍모와 같이 바쳤다.



방 문 감 사 합 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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