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국을 빛낸 위인 - 광대토대왕

역사이야기

by 고망띠네 2016. 7. 10. 01:45

본문

반응형


한국을 빛낸 위인 - 광대토대왕

 


이름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시의 칭호는 영락대왕()이었는데 , '영락()'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374년 탄생, 이름은 담덕

 

386년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됨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이 됨,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고,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고 관미성도 함락됨

 

392년 백제 북쪽 10개의성(황해도지역)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함

 

393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 진무가 이끄는 백제1만대군을 막아냄.

 

394년 고구려 남쪽의 수곡성이 위기에 쳐했으나, 정예기병을 보내 막아냄

 

396년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함

 

398년 숙신을 정복하고 신라를 굴복시킴. 이 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침.

 

400년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

            고구려군이 남쪽에 있는동안 침략해온 북쪽의 후연군에 반격을 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회복함.

 

404년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함.

 

405~406년 북쪽국경을 침략한 후연군을 격퇴

 

407년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킴.

 

410년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함.

 

412년 39세의 나이로 사망.



광개토대왕의 정책

1. 서변 정책
- 광개토대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西晉(서진) 왕조의 내부에서는 이른바 '8왕의 난'이라는 제왕들간의 정권쟁탈전이 벌어져 결국은 361년 서진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 역사상 '5胡 16國(5호 16국)', '南北朝 時代(남북조 시대)'로 불리는 혼란기가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그로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되었다. 
-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구려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前燕(전연:337 370) 前秦(전진:350 394) 後燕(후연:384 407) 北燕(북연:407 436)이 잇달아 일어났다 망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南燕(남연:398 410) 西燕(서연:384 394) 前凉(전양:317 376) 後凉(후양:386 403) 南凉(남양:397 414) 北凉(북양:401 414) 西凉(서양:400 421) 등이 잇달아 생멸했다. 광개토대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는 비문에서 永樂 5年(영락 5년:395) 碑麗(거란) 정벌과 영락 17년(407) 후연에 대한 정벌을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 수 있다.
2. 남변 정책
-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의 즉위 초부터 주로 백제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여기에 왜와 신라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고구려의 남변 정책의 주요 대상은 백제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왜와 신라가 얽혀 있는 상황이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다. 특히 근초고왕은 371년(고구려 고국원왕 41년)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있어서 백제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변 정책이 백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비문에 백제 및 백제와 손잡은 왜를 百殘이나 倭寇(賊)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과거 백제에게 당한 수모를 갚는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 한편 백제는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외에도 왜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우회전략으로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고, 곤경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396년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까지 내려가 백제에 대한 주도권을 크게 장악한 고구려는 400년 신라 구원을 계기로 신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를 크게 격파하여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장수왕 때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중원 고구려비가 설 수 있었던 힘도 실은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래 비문의 辛卯年 기사는 마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왜구의 공적비가 아닌 이상 이런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변 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중국 정책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3. 동북변 정책
-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와 부여간의 통합 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 경에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함"에 이르러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역시 광개토대왕이었다. 이 부여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북부에 비정하는 종래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의 고고 발굴성과에 따른 부여 전기의 왕성 확인 등으로 볼 때 고구려 동북부에서 그 존재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 광개토대왕 당시의 동북변에 대한 정책의 모습을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서변과 남변에 대한 확장 정책과 함께 동북변에 대한 관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은 서, 남,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대의 고구려 장수


1. 아불파연

아불화도가의 아들

                 무사의 기백을 중요시하여 명령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완수한다.

                  광개토태왕이 가장신임했던 장수중 하나이며 죽을때까지 전장에서 죽는다.

2. 아불도가

아불화도가의 손자이자, 아불파연의 아들

무예보다 자연을 더욱 사랑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백제정벌에 나선다. 

관미성 전투에서 관미성뒤 절벽을 타고올라가 관미성성문을 여는

큰 공을 세우지만 전쟁이 끝난뒤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다.

3. 우나굴 

남부대인이다. 

남방전선의 총 책임자로서 백제군의 움직임에 대해 발빠른 대처를 한다.

4. 해진압 

백제출신의 고구려 장수.

               종제인 해운파와 더불어 막고해의 휘하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고구려의 포로가 된다. 

태사 문한의 휘하로 들어가 고구려의 장수가 된다. 

수전에 탁월하여 고구려 수군을 총괄하는 위치에 까지 오른다.

5. 해운파 

백제출신의 고구려 장수.

               해진압의 종제이다. 관미성 공략에 많은 공을 세워 관미성성주가 된다.

                백제의 사두의 꾀에 넘어가 마니산 천제에 참여했다가 죽는다.

6. 고타하  

거란족에게 가족이 몰살당하자 광개토태왕이 거란원정을 떠날때 자원한다.

                광개토대왕의 분신처럼 항상따라다니며 공을 세운다.

                 평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대로자리까지 오른다.

7. 여진  

연나라의 평주자사였던 여진은 반란으로 연왕이 살해되자 고구려에 투항한다.

             광개토태왕의 명으로 유쥬자사에 임명된다.

              고구려 사람인 고운이 연왕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8. 소빈출거 

고구려 남소성 성주 연곡의 손자이다.

전란통에 부모를 잃고 소빈막루의 양자가 된다. 

거란에 충성을 바쳤으나

동생 칸의 질투로 살해될뻔 했지만 부하 갈무상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광개토태왕의 배려로 칸의 자리에 오른다. 그후 태왕에게 충성을 다한다.

9. 고진여 

 관미성의 부장이다.

해운파가 죽은뒤 관미성을 지켜낸다.




방 문 감 사 합 니 다. =^^=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