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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위인 - 논 개

역사이야기

by 고망띠네 2016. 7. 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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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위인 - 논 개

 

 



논개와 그녀의 가계(家系), 성장과정, 그리고 신분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논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볼 수있다. 하지만 이 어우야담에는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개에 대하여 많은 억측과 이론들이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던 중 1700년 초,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을 포양하도록 계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이에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탐문하였으나, 논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포상하지 못하였다.

그 후 꾸준히 논개의 사적조사가 진행되어 1700년대 중반부터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 최공의 시장", "호남절의록" ,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일휴당실기", "매천야록" 등의 문헌과 200년간의 구전설화 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논개의 가계(家系)와 생장과정 등의 행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또한 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 이후 차별받았던 진주지방의 특수한 이해관계 그리고 해주최씨(海州崔氏 ..최경회의 본관)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사료(史料)로서의 객관적 가치는 많이 훼손되고 있다.




1574년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1578년 

부친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됨. 


1579년

이른봄,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

김씨 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됨.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감. 


1582년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따라감 


1587년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때 수행함. 


1590년

최경회의 부실이 됨.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서 기다림. 


1592년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로 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 훈련 뒷바라지함.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함.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한 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절함.





출생지와 가문

논개의 가문에 대한 것은 지역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구전되어 오던 것이 최근 공개되었다. 즉 논개의 성은 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이다. 부는 주달문, 모는 함양박씨, 숙부는 주달무라 한다. 주달문은 한학에 밝았고, 향리에서 청년 자제들의 훈학에 종사한 선비였다고 한다. 따라서 논개는 천한 신분이 아닌 양가여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개의 출생 연월 일시가 1574년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갑술이었으므로 술은 개 戌이라서 '놓은 개(낳은 개)'라 하여 '논개'라 이름하였다 한다.

논개의 애인
논개의 애인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 부사 황진과 우병사 최경회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황진설은 장지연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황진이 장수 황씨로 남원부 주포리 산내촌에서 태어나 1593년 충청 병사가 되었다가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황진은 본관이 장수라는 것과 장수와 인접한 남원 출생이라는 점 외에 장수와 인연을 맺은 적이 없다.
최경회설은 논개가 진주로 가게된 동기를 최경회의 사랑을 받아서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하자 이를 따라 들어간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경회와 논개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최경회가 장수현감 시절 논개의 송사 사건 해결과 관련을 지우고 있다. 논개의 숙부가 논개를 인근의 김씨 문중의 민며느리로 팔아버리자 함양 안의현 외가로 도망했다가 붙잡혀 송사에 연루되었으나 최경회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고, 돌아갈 곳 없는 논개의 모녀를 최경회가 데리고 있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민간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를 1589년으로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역사서에 의해 증명되는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는 1577년경 이어서 시기 차이가 크다. 따라서 최경회와 논개의 관계는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한 1593년 4월부터 6월 사이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논개가 끌어안고 죽었던 왜장
대체적인 견해는 가등청정의 부하로 조선에 건너와 진주성 공격의 선봉대장이었던 '毛谷村六助'라 한다. 이는 일본에서 유명했던 검객으로서 적국 미녀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무덤이 없었으며, 1974년 九州의 유지들이 건축사 上塚博勇을 파견하여 진주의 흙을 가져다가 九州英彦山麓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논개와 의암 바위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새겨진 '義巖'이란 글씨는 정대융의 글씨라 전해진다. 정대융은 임란시 함경도 의병장이던 정문부의 차자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던 선비였다. 인조 2년 1월 정문부가 무고로 피해되자, 그의 유명에 따라 형 정대영과 함께 다음 해 진주로 이거하였다. 따라서 의암이라는 글씨를 쓴 것은 인조 3년(1625) 이후이다. 그리고 효종 2년(1651)에 오두인이 의암이 쓰여진 바위를 보고 「義巖記」를 쓰는 것으로 봐 1625년에서 165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즉 논개가 순국하고 난 30여년 후에 의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논개의 순국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논개의 순국사실이 진주 지역민들에 의해 확고한 사실로 인식되어졌음을 증명해 준다.

논개의 무덤
최근에 논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란이 많은데, 발견된 곳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이다. 함양 지역에는 조선 후기 이후 신안 주씨들이 유력 양반 사족으로서 상당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문중이었다. 그리고 서상면 방지리는 논개의 부모가 일시 웅거했다고 전해지는 지역이다. 그리고 논개의 출생지인 주촌마을과 고개를 넘어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그 타당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논개의 순국
논개의 치적에 대해서 진주민들은 입으로 전하였지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경종 원년(172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 지역의 士民들의 요구로 ≪어우야담≫과 '義巖'이라 새겨진 글자를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때 당(唐)의 왕씨 여인을 숭의부인에 봉했듯이 논개도 이에 상응하는 봉작을 베풀고, 진주성 함락시 전몰한 제신들과 같이 사당을 건립하고, 왕이 사액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1722년 비변사로부터 논개의 순국사실이 담긴 문적을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에 따라 公金과 사전을 공동으로 염출해서 「義巖事蹟碑銘」을 건립했다. 이 비명의 내용을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에 정부는 논개의 순국사실을 인정하고 논개의 자손에게 포상하기 위해 이들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논개의 자손을 찾을 수 없어 결국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최진한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지만 계속해서 논개 포상을 요구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논개 포상 건의는 영조 14년(1738) 남덕하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민들의 요구는 모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영조 16년(1740) 6월에 義妓祠 건립을 허가 받았다. 의기사는 그 후 정조 3년(1779)에 우병사 홍화보가 처음으로 보수하였고 정약용이 논개를 추모하는 「矗石樓懷古詩」, 「晉州義妓祠記」를 지었다. 그후 의기사는 퇴락했고, 다시 순조 23년(1823) 목사 홍백순과 경상감사 이지연이 중건했다.
이때 그동안 지내왔던 6월 29일제를 폐지하고 춘추상제를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고종 5년(1868)에 목사 정현석이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가무를 곁들인 의암별제는 300명의 女妓가 연 삼일간 치제하는 화려한 대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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